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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4. 14世 〉21. <부정공>죽은공휘유원묘갈명(竹隱公諱有源墓碣銘)
1. 문헌 목록 〉14. 14世 〉23. <부정공>학생공휘구경묘갈명(學生公諱九卿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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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부정공>장사랑덕은공휘유수묘지(將仕郎德隱公諱有遂墓誌)
將仕郎德隱公諱有遂墓誌 公諱有遂字士重德隱號也玉川之趙顯麗季有玉川府院君忠獻公元吉號農隱志同圃牧功存宗祊不樂於時歸淳昌之梓鄉其子虔谷瑜以典農寺副正鼎革後不仕盖杜門洞諸賢之一也遯于順天富有鄉兩世並食鄉祠自是以下稍稍敭於榮塗及 莊陵遜位虔谷亞胤節度使崇文與六臣禍父子並命其兄子若僉知若縣監若察訪若參判四昆季次第蹭蹬然友于之篤著稱至今爲南士所頌相好亭是忌察訪諱智崙於公爲七世高祖諱大成從李一齋學士友高其義稱梅窓處士以宗親外裔例有蔭調授勵節校尉忠武衛副司果不就曾祖蓮潭進士諱怡祖諱㫾考諱時諧兩世俱有隱德外祖兵議文化柳迎春 仁廟甲申生以名諸生屢發大小解前後入成均會試不利者五年間爲銓曹薦補將仕郎易未及筮仕六十七年正月二十二日終實 肅廟庚寅也公自在齠齡氣英容秀才思敏給凡同胞者四公其季也父母之愛戀門戶之期望最深夙治功令業詩義擅長弱冠時華譽噪場屋呉正郎燦嘗許以鄉黨後來之秀入京族兄承旨爾鼎進士爾呂爲之主當時公卿唯閔相鼎重李相䎘甚重之性本簡亢每入場以一管毫一丁墨只循格令進退而己絶不欲汲汲通貴人規關節是以愈進愈斥嘗有五試成均報罷頻我文恰似卞和珍之句到叔章猶不廢擧曰先人不以爲無肖謬以門戶計付余惓惓期待至發於末命常懼夫負荷之不克得失當聽天而在我之道不其然乎嗚呼初試與會試匪別途擧子之文匪精於前粗於後而得失相懸如此且交際之盛宜可以寅緣進取矣大者不可期小者似不甚難而終窮而沒其所謂命也歟平居内行備至奉二親事諸兄愛敬恪謹人無間言恫堂兄東川公有至行早卒爲之狀其德纖悉以資旌褒一生嗜好簡編未嘗以生產業經諸心見山水適意處則搬舍之易如鷦鷂一枝故自曳山而校村校村而梧枝此皆遷徒之里名也所居來學者坌集墓在本縣牛谷面長星洞案山乾原配全州李氏逸持平陶庵絅光孫忠義衛泰揆女婦德孔彰生先公二年後公十九年而歿別葬南原府古達坊磊淵村東枕乾之阡擧男女各二男長佶有文行不壽次信女適昌寧曺善慶星州李奎煥孫亨命長房出彦命以族子系次房后夏玖夏璡曹胥子泰鎭衡鎭錦城呉巨源水原白敦源李胥子女曰玾珪曰慶福亮福曰南原尹端爀全義李峻烈海州呉師哲南原尹致謙曰全州李基泰海州呉鼎燁妻爲曾孫餘姑不錄錄中兩尹卽不佞之子之孫以通家之好服公行義不揆人徵謹誌之曰此碩人攸藏樵牧試瞻如斧如堂 南原 尹鼎采 識 進參奉號伊坡 장사랑덕은공휘유수묘지(將仕郎德隱公諱有遂墓誌) 공의 휘는 유수(有遂)요, 자는 사중(士重)이며 호는 덕은(德隱)이다. 옥천인으로 증조는 연담공 진사 휘 이(怡)요, 조는 휘 상(㫾) 고는 휘 시해(時諧)인데 양세가 함께 숨은 덕행이 있었고, 외조는 병조참의(兵曹參議) 문화 유영춘(文化柳迎春)이다. 인조 갑신년(一六四四)생인 공은 명망있는 여러 유생들과 같이 여러 번 대소 향시를 거쳐 성균회시(成均會試)에 응시하였으나 五년간 되지 않더니 전조(銓曹)의 천거로 장사랑이 되어 미쳐 부임하지 못하고 숙종 경인(一七一○년) 정월 二十二일에 六十七세로 별세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용의(容儀)가 수려(秀麗)하고 재행이 영민(英敏)하였으며 四형제 중 막내로 부모의 사랑과 문호의 바램이 가장 깊어 일찍 공명에 뜻을 두고 문예를 연마하니 학업이 크게 진취하고 二十세 미만에 성명을 향리에 떨쳐 정랑 오찬(呉燦)이 일찌기 향당 후학의 준수(俊秀)라 칭도하였다. 서울에 올라가니 족형 승지 이정(爾鼎)과 진사 이려(爾呂)가 영도하고 당시 공경(公卿)중에 오직 재상 민정중(閔鼎重)과 이상숙(李相䎘)이 심히 경중하였다. 천성이 간결하고 고상하며 매양 과장(科場)에 들어갈 때에는 붓 한 자루와 먹 한개로써 다만 명에 따라 움직이고 절대로 권귀의 문에 발을 들이지 아니하니 번번히 낙방하여 다섯 번에 이르렀다. 슬프다. 초시(初試)와 회시(會試)가 서로 다른 과문(科文)이 아닐진대 같은 학문으로써 득실(得失)이 이와 같으니 교제와 인연으로써 도득함이 마땅하리로다. 큰 것은 바라지 아니하나 작은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는데 마침내 포부를 펴지 못하고 별세하니 이게 바로 운명이란 것인가. 평소의 행의가 순독하여 두 어버이를 받들어 모시고 형을 섬기매 애경(愛敬)과 지성을 다하니 가정에 이간하는 말이 없고 지극한 행의가 있는 당형(堂兄) 동천공(東川公)이 일찍 별세한 것을 슬퍼하여 자세히 장덕의 글을 지어 정포(旌褒)를 받았다. 일생동안 학문을 좋아하고 일찍 생산가업에 힘쓰지 아니하며 산수가 좋은 곳을 보면 뱁새가 가지를 옮기듯 쉽게 이사하므로 예산 교촌 오지 등이 다 옮겨 다닌 마을의 이름이었으며 사는 곳마다 배우러 오는 자가 떼지어 모여 들었다. 묘소는 본현 우곡면 장성동 안산 건좌 언덕에 모시었다. 배는 전주이씨로 일 지평 도암 경광(絅光)의 손녀요, 충의위 태규의 따님인데 부덕이 매우 밝았고 공보다 二년 먼저 출생하여 十九년뒤에 별세하니 남원부 고달방 뢰연촌동 동쪽 침건좌 언덕에 별장(別葬)하였다. 공은 二남二녀를 두었는데 장남 길(佶)은 문행이 있었으나 수요(壽夭)하였고 차남은 신(信)이며 딸은 창녕 조선경(曺善慶), 성주 이규환(李奎煥)의 처로 출가하였다. 손 형명(亨命)은 장방출이요, 언명(彦命)은 차방 양자이며 하구(夏玖) 하진(夏璡)은 조서(曺胥)의 아들이고 태진(泰鎭) 형진(衡鎭) 금성 오거원(錦城呉巨源) 수원백돈원(水原白敦源)의 처는 이서(李胥)의 자녀요, 갑규(玾珪) 경복(慶福)·양복(亮福)·남원 윤단혁(尹端爀)·전의 이준열(全義李峻烈)·해주 오사철(呉師哲)·남원 윤치겸(尹致謙)·전주 이기태(李基泰)·해주 오정엽(呉鼎燁)이 증손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치 못한다. 손록(孫錄) 가운데 두 윤(尹)은 바로 나의 자손으로 통가(通家)의 좋은 인연을 맺어 공의 행의에 감복하는도다. 인미식천함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기록 하되 이 곳은 석인(碩人)의 유택이니 초동 목수는 위엄있는 정침으로 보기를 바라노라. 南原 尹鼎采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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